신혼일기2011. 3. 17. 01:01










볕이 좋은 일요일 오후. 아빠가 집에 있으니 연수가 좀처럼 낮잠잘 생각을 않는다.
모처럼 독서하는 아빠 옆에서 놀아달라고 낑낑낑.. 낮잠재우기를 포기하고 세 식구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오늘은 천천히 동네 산책을 하자.










아파트 단지 건너편에는 오래된 주택가가 있다.
그 한가운데에(주택가로 보면 끄트머리지만 새로 생긴 우리 아파트 단지까지 아울러서보면 동네 한가운데쯤 된다) 성당과 놀이터와 경로당이 도란도란 어깨를 붙이고 들어서있다.

처음 이 동네를 둘러볼 때부터 나는 이 공원이 마음에 들었다.
오래된 성당에 이웃해있는 풍경도 좋았지만, 큰 형아들이 많이 나와 놀고 있는 것이 참 좋았다.
고등학생쯤 되어보이는 키 큰 동네형아들이 올망졸망한 꼬마동생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려 축구도 하고, 그네도 밀어주는 모습이 왠지 든든했다.
공부에 쫓기고, 그도 아니면 게임방 출입과 저들만의 문화에 바쁠법한 큰 형아들이 어린 동생들과 몸을 부대끼며 놀고 있는 모습이 낯설기도 했지만, 동네 아이들이 모두 어울려놀던 내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그리 낯선 것만도 아니었다. 
때로는 부러 동생의 약한 힘에 끌려다니는척도 해주고, 떄로는 의젓하게 한 수 가르쳐주기도 하면서 같이 어울리는 모습은 아직 이 동네에 놀이문화가, 아이들의 건강한 공동체가 살아있다고 말해주는 것같았다.
 
놀이터에서 아이들은 형과 언니를 보고 배운다. 
고작 네살인 연수도 제가 아직 못하는 어려운 동작(?)들을 거침없이 해내는 형아들을 볼때면 그 눈빛이 한없이 초롱초롱하고 진지하다. 
그러니 놀이터에서는 형아들이 선생님이다. 큰 형아들께서 큰 선생님 노릇을 잘 해주기를 빌 뿐이다. 그래서 내 아이도 함께 어울려 놀면서 함께 자라는 귀중한 가르침을 얻을 수 있기를...  
   










따신 오후. 낮은 그네에 눕다시피한채 제 힘만으로 그네를 밀어올리려고 애쓴다. 어느새 또 한가지 새로 시작하는 아이.











미끄럼틀을 빠져나오고 나니 정전기 덕분에 머리카락이 솔잎같이 뻗었다. ^.^  











할머니 기다리며 유모차도 해바라기한다.
어느 날은 세 대가 나란히 서있기도 했는데... 오늘은 친구 한분이 덜 오셔서 궁금하시겠다. 
어린 손주가 쓰다가 할머니께 물려드리는 딱 하나밖에 없는 물건 아닐까. 유모차. ^^; 












경로당 지나면 바로 고덕성당으로 들어갈 수 있는 쪽문이 있다. 
연수는 언제나 성모상 앞을 지나..











성당과 마주보고 있는 '성보나 유치원' 놀이터로 직행한다. ^^
천주교 신자는 아니지만 왠지 성당유치원은 아이를 보내고싶다는 생각이 든다.
수녀님들이 따뜻하게 보살펴줄 것만 같고, 다른 곳보다 좀덜 상업적일 것도 같고....
글쎄. 연수가 유치원갈 나이가 되면 한번 진지하게 알아봐야겠지..











참 열심히도 오른다. 매달리고, 기어올라가고... 여자아이들도 그러는지 궁금하다.
그저 작은 놀이기구 하나만 있어도 제 힘을 온통 다 쏟아부어가며 참 열심히 논다.
제가 제일 좋아하고, 제일 하고싶은 '놀이'에 대한 성실함, 집중력, 호기심, 열정...
아이가 노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른인 내가 오히려 배워야겠다.. 싶어질 때가 많다. 











잠시 쉬나? 실은.. 저 나무판을 미끄럼틀처럼 타고 내려가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 궁리하는 중.











종교를 믿진 않지만 나는 절도 좋아하고, 성당도 좋아한다.
일상에서 자주 '기도하는 마음'을 갖고 싶고, 집 가까이에 이렇게 잠시 찾아와 기도하고 갈 수있는 조용한 장소, 비일상적인 공간이 있는 것이 참 고맙다.
이 곳으로 이사와서 고마운 것이 정말 많다.
놀이터, 성당, 작은 산, 시장이 두루두루 어우러져있는 이 마을을 걸어다니며 나는 어떤 뜻깊은 곳을 '순례'하는 마음이 되곤 한다. 번잡하지 않게, 따뜻하게 어우려져 살아가는 사람들과 공간이 모두 고맙다.
 
 









어느 조용한 날, 살며시 강당 문을 열었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스테인드 글라스 안으로 비쳐들어오는 햇빛이 참 아름다웠다. 이 세상 것이 아닌 것처럼 예쁘다.. 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은 연수와 둘이 소강당의 유리창에 손을 가져다대고 우리의 손가락까지 물들이는 색유리의 빛깔을 바라보기도 했다.










종교를 갖고있진 않지만 아이와 함께 절이나 성당을 자주 찾고싶은 것은 이런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고싶기 때문이다.
이 공간에 담긴 고요한 정적과 천천히 흐르는 시간, 절박하게 기도하는 사람들의 떨리는 어깨.. 같은 것들에 대해서도 언젠가는 이해하고 마음에 담을 수 있겠지.  
















잠시 엄마를 따라 색유리 빛깔을 보는가싶더니 이내 아이는 쌩하고 뛰어나간다.
햇빛과 놀이터가 불렀나보다.












나는 그를 잘 모른다.
다만 많은 이들의 마음에 위로와 감동을 주었던 큰 스승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생을 걸고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하려고했던 그의 노력과 사랑이
오랜 시간 이땅에서도 핍박받는 사람들과 늘 함께 하려고했던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신부님이나 수녀님들의 실천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4대강사업과 최근의 구제역사태 등에 대해 생명존중, 자연만물과의 공생의 관점에서 문제제기하고 실천하는 천주교의 움직임이 반갑고 고마울 뿐이다.  
우리 가족이 살아가고있는 이 곳, 동네성당에서는 어떤 소식이 들리나, 어떤 활동을 하나.. 지켜보고 함께 할 수 있어도 참 좋겠다.











성당 옆, 야트막한 동산은 길게 구릉구릉 이어져있다.
고덕시장, 상일동 역, 조금 더 가면 고덕역까지.. 작은 산은 때로 찻길에 낮은 쪽 몸을 내주면서도 계속 이어지는 것 같다.
산책로라고 부르는게 더 적합할 완만한 등산로도 계속 이어진다. 마을 곳곳에서 연신 올라오고, 내려가는 길들은 중간중간 운동기구들이 모여있는 쉼터에서 모였다가 다시 다음 쉼터로 이어졌다. 
천천히, 아이들과 함께 이 산을 따라 걸어다녀볼 생각에 마음이 설렌다. 작은 산이라도 철마다 얼마나 아름다울까. 
 










나뭇가지 찾았다. 가족 모두의 손에 쓸만한 나뭇가지를 하나씩 쥐어줘야 마음이 놓이는 연수.












오래된 주공아파트가 내려다보인다.
한참 걷고 운동기구를 오르내리며 논 아빠와 연수가 배가 고프단다.
그럼 시장에 갈까.. 사람이 사는 마을의 백미, 구수한 순대국냄새와 잔치국수집 아주머니의 신비한 손맛이 있는 시장으로..!












왼편으로는 상가건물이, 오른편으로는 작은 컨테이너박스들이 쭉 이어진 고덕시장.
멀리에 '강일 1,2지구 입주를 축하합니다'라는 플랭카드가 걸려있다. 
오랜 시간 대단지 아파트 신축공사의 소음과 먼지에 시달리셨을 분들. 
그래도 새로 사람들이 많이 들어오면 재래시장과 인근 상권이 활성화될거라 기대하며 더러 희망도 갖고, 각출해 모둔 상가연합회 예산으로 새 이웃들보라고 플랭카드도 큼지막하게 걸어주셨을 것이다.
어느날, 이 골목의 작은 정육점에 들어가 첫 집들이에 쓸 갈비와 수육고기를 샀던 내게 '2지구에 이사왔냐, 못보던 얼굴이라 그런것 같더라. 집들이하는가보다'하시며 환하게 웃어주시던 아주머니처럼.













잔치국수 한그릇 먹고 흐막하게 돌아오는 길.
꽃집앞에 나와있는 노란 수선화 화분에 눈이 갔다. 값을 치르고 화분을 받아드니 연수가 제가 꼭 들고 가야한단다. 
집까지 조심조심 소중히도 안고왔다.
 



+



노란 수선화 화분 하나가 며칠째 온집을 환하게 해준다.
일상은 이렇게 잔잔하고 고마운 일 투성인데 그 고마움을 미처 생각 못하고 지나갈 때가 많다. 
오늘은 살아가는 일이 문득 눈물겨워지는 순간이 있었다.
 
연수 삼촌이 일본에서 돌아왔다.
작년 7월에 오랫동안 바라던 워킹홀리데이비자를 받아 일본에 가서 일을 하고있던 시동생이다.
지진 소식을 처음 들었을때 연수와 나는 우리가 곧잘 찾아보던 지구본에서 다시 '삼촌이 있는 일본'이 어디인가 찾아보고 삼촌이 괜찮아야할텐데.. 걱정했다.
전화는 불통이었지만 다행히 카카오통으로 연수아빠와는 연락이 잘 되어 무사히 잘 있고, 시동생이 있는 동네는 지진피해가 거의 없어 평온하다는 소식을 듣고 온 가족이 안도했었다.

그 뒤로 TV 안 보고, 이사오면서 그나마보던 일간지도 끊고 주간지와 월간지만 받아보는 나는 일본지진소식을 상세히는 모르고 있었다. 
너무 마음아픈 일도 많고, 영상도 충격적이어서 당신은 안보는게 오히려 나을거라는 남편의 말을 듣고 그 고통을 가만히 짐작만 해보았을 뿐이다. 

아마도 원전 사고가 제일 큰 두려움을 몰고오는 듯했다. 
별일없이 잘 있다던 시동생도 일찍 귀국하겠다 했고, 노심초사하던 가족들 모두 그 결정을 반겼다. 
시동생은 오늘 김포공항으로 잘 들어왔다. 

일본으로 가기전에 시동생은 일년정도 우리집에서 함께 살았다. 
그래서 연수는 지금도 우리 식구는 '아빠 엄마 연수 삼촌' 넷이라고 말한다.
당연히 우리집으로 올줄알고 나는 어제부터 공부방에 쌓여있던 짐을 다른 방으로 옮기고 삼촌 이부자리를 가져다놓았다.
저녁 5시반에 공항에 도착한다니 저녁은 집에서 함께 먹겠구나 생각하고 갈비찜을 하고 냉이된장국을 끓였다.

그런데 저녁쯤 시이모님께 전화가 왔다.
시동생을 이모님댁에서 묵게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왜 그러시나.. 나는 그저 배부른 내가 밥차리기 힘들까봐 그러시는가 싶어 괜찮다고, 저희집에 오셔야죠 했다.  
그런데 이모님의 걱정은 방사능 유출이었다. 연수도 어리고, 배속의 아기도 있는 형집으로 가지말고 어른들만 계신 이모님댁에 와서 씻고, 빨래도 좀 하고 며칠 묵고갔으면 한다는 말씀을 듣고 나는 어안이 좀 벙벙했다. 설마 무슨 일이 있으랴, 어른들이 지레 걱정이 많이 되셔서 그러는구나.. 싶었지만 새삼 그 정도인가.. 싶어 덜컥 겁도 났다. 
남편에게 전화를 했더니 안그래도 아침에 통화할때 시동생이 별일없겠지만 언론에서도 워낙 얘기하고 해서 자기도 조심스럽다면서 집으로 바로 안가고 어디 모텔같은 곳에 숙소를 잡아 하루이틀 씻고 빨래라도 좀 맡기고 들어가겠다 해서 '뭘 그러냐, 괜찮겠지. 집으로 오라'는 얘길 했노라고 했다. 도착하면 다시 통화하기로했으니 다시 얘기해보겠노라 했다.

머리속이 좀 어지러웠다. 
한국에 돌아왔지만 선뜻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시동생이 안쓰러웠다.  
별일없겠지... 하지만 스스로도, 다른 이들로부터도 불안한 시선을 받아야하는 것이 힘들지 않을까.
행여나 그때 그곳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또다른 주홍글씨처럼 낙인이라도 받게되는건 아니겠지.. 시부모님이 이 일을 아시면 얼마나 걱정하실까.. 잘 알지못하는 상황이 걱정만 커지게 하고 있었다.

시동생은 짐을 찾는데만도 시간이 오래걸려 8시쯤 되어서야 공항을 빠져나왔고 오늘은 이모님댁으로 가겠다고 연락해왔다.
그 사이에 연수와 나는 먼저 냉이된장국에 밥을 말아 저녁을 먹었고 낮잠을 안잔 연수는 일찍 저녁잠이 들었다.  
손도 안댄 갈비찜 냄비를 시원한 베란다에 내놓으며 마음이 쓸쓸해져왔다. 

나는 그리 살갑고 편안한 형수는 아니다. 
함께 사는 동안에도 잘 해준것보다는 그저 내 마음하나 불편하게 갖지 않으려고 나름의 애만 열심히 쓰며 살았다. 
어제오늘 돌아오는 시동생 맞을 준비를 하면서도 다행스러운 마음, 반가운 마음보다 같이 지내는 동안 밥 잘 해줄 걱정과 불편해하지 말아야지.. 하고 내 맘 다잡을 생각이 앞서서 허둥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서울에 와서도 편히 집에 돌아오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짠했다. 
살아가는 일이 때로 이렇게 눈물겹구나...
큰 일을 혼자 겪으며 무섭기도 하고, 가족들 곁으로 얼마나 돌아오고 싶었을까. 그런 사람을 더 반갑게 따뜻하게 맞아줘야하는데.. 그 마음을 못 먹고 있었던 내가 부끄러웠다. 
 
연수 잠든후 인터넷을 찾아보니 원전사고는 현재까지는 일반인에게까지 방사능 피해를 걱정할 수준은 아닌 것 같았다.
다만 앞으로 아주 심각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고, 그때에 일본사람들이 겪을 피해와 고통은 엄청난 수준일거란 내용을 보고 가슴이 서늘해졌다.  주변지역 모두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2차대전 당시의 원폭피해만으로도 일본인과 재일조선인 모두 공히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던가...
원폭피해 2세, 3세의 고통은 또 얼마나 깊었던가.. 그 역사를 반복해서는 안되는데..

원자력 에너지에 크게 의존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한번의 사고만으로도 이렇게 큰 위험과 고통, 공포가 따르는 원자력 대신 지속가능한 대체에너지 개발이 정말로 절실하다.  

부디 더 큰 사고가 없기를.. 원전도, 지진 피해도 무사히 잘 복구되기를..
 
오늘 문득문득 "삼촌 언제 와? 삼촌 어디 있어? 숨바꼭질하나~? 문 뒤에 숨었나~?"하며 놀던 연수.
경상도 남자답게 "연수 안녕! 많이 컸네~"하고 나면 쓱 자기 방에 들어가버릴 무뚝뚝한 삼촌이 보고싶다.
연수가 내내 기다리던 우리 삼촌은 하루이틀 늦어지겠지만 곧 볼 수 있을 것이다. 잘 돌아와줘서 정말 고맙다.
그곳이 나고자란 고향인 사람들, 거기서 직장을 다니고, 가정을 꾸려 아이를 낳고 키우던 엄마아빠들... 그곳이 떠날수없는 삶의 터전인 낯모르는 이들의 안녕을 비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    




Posted by 연신내새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