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살림 강일동 마을모임에서 하는 그림책 소모임에서 지난 달에 함께 봤던 그림책들.

 

강일도서관과 지역아동센터 등 여러 곳에서 아이들에게 그림책읽어주기 봉사활동을 하고 계시는 우리 아파트 이웃 안영미 님이 소개해주셨다.

 

 


펠레의 새 옷 - 10점
엘사 베스코브 글 그림, 김상열 옮김/비룡소

 

 

우리 아이들이 집안일을 잘 돕는 아이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청소도 잘 하고, 설겆이도 당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하고, 요리도 함께 하면서 슥슥 삭삭 즐겁게 자기 살림을 꾸려나갈 줄 아는 사람으로 자라나기를 바란다.

음. 언제쯤 그런 일이 가능할까?

연수가 지금 일곱살.

연수랑 함께 설겆이를 한 적이 딱 한 번 있다.

빨래를 같이 개어본 일이 두어번, 요리할 때 야채를 썰게 해본 것이 대여섯번 정도.

맡은 일을 멋지게 잘 해내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아직은 장난치고 싶은 마음이 더 많은 개구쟁이 남자아이라

데리고 일하려면 내가 야단치고 걱정하고 뒷수습할 일이 너무 많다.

그래서 그냥 혼자 하는게 훨씬 편하고 좋지만... 그래도 하고싶어할 때는 시켜주고, 가르쳐주려고 애쓴다.

부모와 함께 집안일하기를 좋아하는 아이, 살림을 할 줄 아는 사람으로 키우고픈 꿈을 지키기위해

내가 조금 더 인내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되기에ㅡ.ㅜ

 

<펠레의 새 옷>은 그림책의 좋은 고전중 하나로 손꼽히는 책이라 한다.

이 책을 지은 엘사 베스코브 란 분은 스웨덴의 대표적인 그림책작가라는데 나는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우리 아파트 작은도서관에도 이 분의 그림책 몇 권이 눈에 잘 띄는 곳에 비치되어 있어 '참 예쁜 책이네' 하며 눈여겨보았었는데 이 날 안영미 님의 소개를 들어보니 좋은 그림책을 많이 그린 분이란다.

하지만 '고전'이 좀 그렇듯이 언뜻 보면 그림이 좀 심심한 것도 같고, 이야기가 길어 어린 아이들에게는 지루할만한 책도 있다.  

어른인 내게는 잔잔하고 따뜻한 감동과 울림을 주지만 말이다.

 

100년 전의 스웨덴이 이 그림책의 배경이다.

8살 정도 되었을까?

혼자서 새끼양을 돌보는 어린 소년 펠레는 자신의 작아진 옷을 대신할 새 옷을 만들기 위해 양의 길어진 털을 깍는다.

그리고 양털을 들고 한명씩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자신의 옷을 만드는 과정을 밟는다.

어른들은 기꺼이 자신이 맡은(펠레에게 부탁받은) 공정을 담당해주며 자신이 그 일을 할 동안 펠레에게 크고작은 집안일들을 거들어줄 것을 부탁한다.

양털을 손질하고, 털실을 뽑고, 실을 예쁜 색으로 물들이고, 그 실로 옷감을 짜고, 옷감을 자르고 바느질해 옷을 만드는 다양한 과정 동안

펠레 역시 밭의 잡초를 뽑고, 소에게 풀을 먹이고, 염색약을 사러 시장에 다녀오고, 어린 동생을 돌보고, 장작을 나르는 등 정말로 많은 일을 한다.

 

어린 아이에게 너무 일을 많이 시키는거 아냐?? 하고 아동노동의 강도를 걱정할만큼

오늘날의 아이들로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많은 일을 함께 하며 펠레는 자신의 새 옷 만들기에 참여한다.

아니, 사실 펠레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새 옷 한 벌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어리지만 이미 펠레는 직접 생산에 참여하는 주체, 자립적인 인간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 어린 생산자는 양에게 감사를 표한다.

"정말 고마워! 네 털로 이렇게 멋진 새 옷을 지었어."

 

 


 



안나의 빨간 외투 - 8점
애니타 로벨 그림, 해리엣 지퍼트 지음, 엄혜숙 옮김/비룡소


 

 

이 날 함께 소개해주신 <안나의 빨간 외투>도 옷 한 벌이 만들어지는데 필요한 여러가지 공정과 거기 깃든 많은 이들의 수고들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그 수고의 대가는 이제 엄마가 가지고 계신 할아버지의 금시계, 목걸이, 도자기 같은 귀하고 좋은 물건들로 치루어진다.

 

옷 한벌이 만들어지기까지 많은 이들의 수고가 필요하다는 것, 지금은 우리가 쉽게 사서 쓰는 물건들이 실은 모두 누군가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 보이지 않는 그 분들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물건을 소중히 잘 쓰면 좋겠다는 것 등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가치들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이야기 속에, 따뜻하고 고운 그림으로 전해진다.

 

전쟁후 도시는 파괴되고 물자는 부족하고 돈도 없던 시절, 한 아이의 옷을 만들기위해 여러 어른들이 마음을 모았던 따뜻한 이야기를 읽으며 잔잔한 감동도 받았지만

<펠레의 새 옷>과 함께 읽다보면 어린아이의 작지만 씩씩하고 건강한 노동이면 충분하던 옷 한 벌이 

어느새 금붙이와 고운 물건들 같은 것들로 그 대가의 내용이 바뀐 것만 같아 조금은 서글픈 기분이 든다.

이제는 그저 어린 아이의 힘만으로는 제 옷 한 벌도 얻을 수 없는 시절이 되어버린 것이다.  

 


 


용감한 아이린 - 10점
윌리엄 스타이그 지음, 김서정 옮김/웅진주니어




 

<용감한 아이린>은 우리 아파트 작은 도서관에서 제목과 표지가 눈에 띄어 얼른 읽어본 책이다.

이 책을 쓴 윌리엄 스타이그 라는 작가분은 60살이 넘은 후부터 그림책을 쓰기 시작해서인지 글에서 삶의 연륜 같은 것이 느껴져서 좋다.

재미있으면서도 통찰력있는 문장, 이야기, 좋은 그림이 어우러져서 어른 독자가 재미있게 볼 수 있다.


위의 두 책을 보다보니 이 책 생각이 났다.

나는 아이린이 엄마의 수고를 아는 아이여서 좋았다.

어린 아이가 그러기가 쉬운 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크면 엄마의 수고를 이해하는, 그래서 고마워하고 제 힘껏 엄마를 도우려고하는 속깊은 아이들도 있는 법이다. 

내가 그랬다. ㅎㅎㅎ

 

아주 어린 시절에, 아이린처럼 8살, 9살쯤 됐던 어린 아이였을 때

나는 당시 한옥집이었던 우리집 시멘트 부엌에 큰 나무둥치를 잘라 만든 발받침을 놓고 그 위에 올라서서 설겆이를 돕곤 했다.

 

아마도 대식구의 막내였던 나는 어른들로부터 '아이구 참 대견하기도 해라'하는 칭찬을 받는 것이 너무 좋았던 것 같다.

뭔가 집안에 필요한 존재로 인정받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고, 나도 그런 어려운 일을 잘 해낼 수 있다는걸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농사일과 방앗간 일 등 살림의 규모가 컸던 우리집에는 우리 가족 어른들뿐만 아니라 집안일을 거드는 다른 어른들도 많이 계셨으니

아마도 일손이 부족해서 어린 나까지 도와야했다기 보다는

내가 굳이 해보고싶다고 고집을 부려서 엄마가 그래, 어디 그럼 해봐라 하고 기회를 주시고, 야단도 치고 칭찬도 해주며 어린 꼬마지만 내게 일을 가르쳐주신 것 같다.

집안일을 돕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리라. 모두가 바쁘고 또 힘들게, 수고롭게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도 내 작은 힘이지만 보태고 거들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일하는 사람을 존경하고, 가족의 먹을 것을 자기 손으로 마련하고, 집을 깨끗이 정돈하고, 작게나마 자신이 먹을 농작물을 스스로 키우는 것을 중요한 일로 생각하고 꼭 하고 싶어하는 것에는

어린 시절에 경험한 이런 일들이 은연중에 마음 깊이 간직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집안일, 살림, 농사.. 이런 일들은 중요하고, 가치있고, 소중한 삶의 기본들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이 삶의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배우고 자란다.

 

예전에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부모들과 할아버지 할머니의 일하는 모습을 보며 자랐다.

자연스럽게 일을 배우고 조그만 손이지만 따라 해보고 거들 수 있는 일부터 거들면서 차근차근 일을 배웠다.

요즘 아이들에게서는 생활과 배움이 너무 분리되는 것 같다는 걱정이 든다.

과일깍는 법, 걸레빠는 법, 화장실 청소하는 법, 설겆이하는 법, 농작물과 화분에 물주기..

여러가지 공부에 바쁜 아이들이 이런 것을 배울 시간이 어디 있냐 싶겠지만

이런 작은 집안일들 안에도 소중한 인생의 가치들이 깃들어 있다.

조용히 심호흡을 고르고 집중하는 법, 정교하고 맵씨있는 손기술을 익히기 위한 인내와 노력, 깨끗하게 내 주변과 공간을 정리하는 기쁨, 생명을 키우고 돌보며 느끼는 엄중하고도 깊은 감동.

이 것은 똑똑한 사람보다는 현명한 사람, 잘나가는 사람보다는 좋은 사람이 되는데 꼭 필요한 자세이자 감정들이 아닐까.

 

 

아이들이 문제가 아니다.

실은 어른인 내가 먼저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이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다.

다행히도 나는 살림을 잘 하지는 못하지만 

살림하고 아이들 키우는 내 일을 좋아한다.

청소, 요리, 빨래 같은 기본적인 집안일을 즐겁게 임하는 엄마와 함께 살면서 

우리 아이들도 나중에 어른이 되었을 때는 그 일을 즐겁게, 행복하게 해나가며 자기 삶을 소중히 살아내준다면 참 좋겠다.


Posted by 연신내새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