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2015. 9. 6. 22:11

낮은 산, 키 큰 소나무, 산 위쪽 사슴들이 살던 우리, 눈오던 설날 아침 사랑방 바깥 마루에서 올려다본 하늘, 뒤산의 키큰 소나무 위로 떨어내져리던 하얀 눈송이, 

대나무숲 

유아원으로 잠시 쓰였던 마을회관이 있던 뒷마을로 넘어가는 고개길, 각시풀을 땋아 무수히 만들어놓았던 머리채,

 

꿀벌통이 놓여있던 밭 가, 오빠가 귀지를 파준다는 엄마를 피해 뛰어 도망가던 앞 밭 


언니가 머리에 대야를 쓰고 밤송이를 줍던 뒷마당 수도가, 때로 고기를 삶는 김이 펄펄 피어오르던 뒷마당 가마솥,

기도날 밤 팥시루떡을 먹고싶어 졸린 눈을 비비며 잠을 참던 부엌, 두부를 만들기위해 할머니와 엄마가 큰 베보자기의 양끝을 꼭 잡고 쥐어짜시던 모습, 겨울밤에 먹던 고추가루를 띄운 시원한 동태무국, 얼음이 사르르 떠있는 식혜, 할머니가 직접 반죽하고 꾸덕하게 말렸다가 기름에 튀기고 조청을 바르고 쌀튀밥을 붙여 만드시던 과즐(한과), 흙바닥이었다가 시멘트바닥으로 바뀌었던 기와집 부엌, 그 부엌에서 엄마가 해주셨던 계란후라이를 삼남매가 나눠먹을 때의 맛있는 기억. 


앵두나무가 있던 뒤뜰, 장독대, 부엌 문 밖 땅속에 묻어두던 알밤, 


대학생이던 작은고모와 큰 언니가 함께 써서 고운 로션냄새와 예쁜 이불, 인형들이 있었던 건넌방, 

할머니의 옛날 얘기를 재미나게 들으며 잠을 청했던 사랑방, 

아빠와 엄마와 계시던 작은 안방, 하얀 머리에 항상 곱게 비녀를 지르고 한복을 입고 지내셨던 증조할머니와 내가 함께 썼던 제일 큰 방, 부엌과 통하는 작은 문이 있던 큰 방의 이불 장롱 위에서 혼자 누워 삐져있었던 저녁, 

어느 밝은 오후 낮잠에서 깬 내가 큰방 문을 열어보니 마루에서 누군가와 전화를 하며 울고있던 젊은 엄마.



큰 마당 가득 멍석을 깔아놓고 감 껍질깍는 기계를 가져다놓고 동그랗게 감을 깍아 끝을 뾰족하게 다듬은 싸리나무 가지에 꽂아 곶감을 만들던 날,     


매실주를 담근 큰 항아리가 있던 광, 매실주 항아리속에 손을 넣어 시큼한 매실을 꺼내먹는게 좋아서 자꾸만 살짝 광에 갔던 일. 


아빠 자전거를 타고 내려가다 넘어져 다리를 다쳤던 기억. 집으로 올라오는 길. 지단이꽃(황매화)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던 길. 


나의 첫번째 집, 큰 집, 전쟁 때는 인민군도 지휘본부로 쓰고, 국군도 지휘본부로 썼다는, 마을에서 잘 보이는 작은 언덕위의 아름다운 기와집. 

지금은 고속도로에 묻혀버린, 사라진 나의 첫번째 집. 

그 집 안방에서, 초겨울 아침 동이 막 틀무렵에 태어났던 작은 여자아기. 그 집의 마지막 아기였던 내가 걸음마를 걷고, 뛰고, 놀고, 그 품에서 잠들며 자라다가 9살이 되었을 때 헐려진 집. 

아름다운 그 집. 



젊은 아버지가 오토바이를 타고, 황소를 먹이고, 사슴을 키우셨던 집. 

우리 가족의 첫번째 자동차였던 갈색 트럭이 처음으로 들어왔던 집. 펌프가 있던 수도가 위쪽으로 처음으로 차고가 지어졌던 집. 


벌통에서 꿀을 따는 날이면 놀러왔던 친구들이 벌에 쏘여 울다가도 달콤한 꿀집을 입에 받아넣고 오물오물 먹으며 눈물을 훔쳤던 집. 

물에 빠진 꿀벌을 구해주려고 꽃잎에 태우려다 벌에 쏘였던 기억,


건너방에서 방학숙제를 끝내지 못해 낑낑대다가 마루에 아빠와 앉아 '방학숙제는 다 했니?'하는 아빠의 물음에 '네'하고 대답하는 언니와 오빠 목소리를 들으며 부러워하던 기억. 


겨울날 부엌에서 데운 물로 햇빛 따뜻한 뜨락에 대야를 놓고 김이 오르는 물을 부어 머리를 감던 기억. 


신식 화장실 높은 옥상에서 뛰는걸 좋아했던 나. 다칠까 걱정되셔서 하지마라 야단치시던 엄마, 그래도 또 뛰던 기억..


내 눈에는 지금도 다 선한데, 그 풍경, 그 집, 벽에 걸린 멍석들, 앞밭, 뜨락,   

돌아갈 수도, 다시 볼 수도 없네..


  

Posted by 연신내새댁